사화와 반정의 시대 (체험판)

사화와 반정의 시대 (체험판)

  • 자 :김범
  • 출판사 :역사의아침
  • 출판년 :2015-06-30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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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 뒤 첫 세기를 지나면서 맞은 성종·연산군·중종의 치세 75년은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등 국가의 주요 제도가 정비된 기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 최초의 사화, 조선 최초의 반정 등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변화가 일어난 격동의 기간이기도 했다. 2007년에 출간된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해 다시 출간한 이 책은, 성종·연산군·중종대에 전개된 정치적 역정과 의미를 국왕·대신·삼사(三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이를 통해 조선의 정치는 국왕·대신·삼사라는 주요한 세 정치세력이 시기와 국면에 따라 협력·대립관계를 바꿔가면서 운영되었으며, 그 결과 어느 한 정치세력의 독주보다는 서로의 합의와 균형이 중시되는 형태를 갖게 되었음을 규명한다.





조선 최초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

그 뜨거운 정치적 역정을 새롭게 읽다!




시대와 지역을 넘어 중앙 정치에는 평화와 안정보다는 긴장과 갈등이 우세하다. 조선이 건국된 뒤 첫 1백 년을 통과한 시간에 걸쳐 있는 성종·연산군·중종의 3대 75년은 그런 일반적 과정에서도 특히 흥미롭고 중요한 사건이 전개된 기간이었다. 그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와 반정’이다. 왕조가 탄생한 지 거의 1세기 만인 성종 중반 『경국대전』이 마무리되어 주요제도가 완비됨으로써 조선의 앞길은 평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13년 뒤 최초의 사화가 일어나고 다시 20년 동안 두 번의 사화와 한 번의 반정이 더 발생하면서 크게 빗나갔다.

제도가 완비되었지만 심각한 혼란과 갈등이 이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은 ‘삼사’를 그 대답의 핵심어로 제시한다. 이 기간의 뜨거운 정치적 역정은 삼사라는 중요한 제도가 현실에 뿌리내리는 성장통이었다. 아울러 그런 과정을 통과한 신하들은 ‘훈구’와 ‘사림’이라는 고정된 이분적 구도가 아니라 ‘대신’과 ‘삼사’라는 직책에 따라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거쳐 이뤄진 국왕·대신·삼사의 ‘정치적 정립구도(鼎立構圖)’는 그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중앙정치를 움직이는 핵심적 체제로 기능했다.





왕권의 안정, 그리고 삼사의 정립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갑자기 붕어하자, 성종은 왕의 적장자가 아님에도 13세의 나이로 갑자기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성종은 성년이 된 재위 7년까지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과 훈구대신에 의한 원상제라는 변형된 왕정을 경험해야 했다. 그 동안 성종이 훈구대신의 지나친 권력 팽창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모색한 성종은, 훈구대신의 지나친 권력 팽창을 견제하고자 치세 중반부터 대간을 적극 후원했고, 그에 힘입어 대간은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면서 위상을 크게 높였다. 한편으로 성종은 홍문관을 언관화함으로써 언론기관 내부의 견제와 균형을 유도했다. 그 결과 성종 초까지 대신에게 기울어진 중앙정치권력은 이후 국왕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안정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어쩌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수행하고자 했던 성종의 노력은 대간이 충분히 제어되지 않음으로써 만족스럽게 구현되지 않았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그 이면과 본질





성종의 적장자로 열 번째 국왕에 올라 12년을 재위한 연산군은, 즉위 당시 부왕의 유산이었던 삼사의 지나친 언론활동은 매우 불만스러웠다. 성종도 고민했듯, 삼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엽적 사안들을 물고 늘어져 국왕과 대신의 정당한 권한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왕과 대신이 보기에 그것은 윗사람을 능멸하는 ‘능상’이었다.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의지를 가진 연산군에게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며, 이를 위해 특별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신도 공감했다. 그 결과 연산군 4년 7월,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김종직과 그 일파의 숙청이라는 무오사화의 표면적인 이유 이면에는 삼사의 활동을 제재하려는 연산군의 의지와 대신 세력의 동의가 내포되어 있었다. 사화의 지속기간·처벌규모·수준 등을 분석했을 때 전면적인 숙청이 아닌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폭정이 아닌 왕조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무오사화 이후 강력해진 왕권을 오용한 연산군의 일탈은 대신과 삼사를 협력하게 했으며, 연산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고자 연산군이 주도한 갑자사화는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과 연산군의 폐위로 이어졌다.





새로운 중흥을 위한 끝없는 노력과 한계



비록 반정 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단지 추대된 국왕이었지만, 중종은 즉위 후 연산군 때의 정치적 파탄을 수습해 왕권을 회복하고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기묘사림의 등용과 김안로 일파를 앞세운 정국운영 등은 그런 모색의 대표적 성과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중종은 왕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했다. 집권 초반의 정국공신, 삼사의 변화를 위해 등용한 기묘사림, 사화를 주도한 일부 대신, 그리고 권신 김안로에 이르기까지 중종은 대체로 어떤 집단에 왕권의 영향력을 위임하거나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로 치세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결국 사평에서 드러나듯 중종의 과단성의 부족에서 기인한 인사정책의 실패 등은 그로 하여금 어떤 문제를 적절한 시점에서 제어하거나 수습하지 못한 채 계속 확대시키다가 결국 밀지와 숙청이라는 돌발적 수단으로 사태를 종결하게 했다. 이처럼 국정의 핵심인 인사정책에서 충분한 판단력과 조정력을 발휘하지 못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은 중종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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